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한 식구 된 이들이 모여, 아득함과 애틋한 심령으로 하나 되어 예배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부모로서, 형제 자매로서, 같은 몸의 지체로서, 여전히 그날은 이해되지 않고, 그 순간은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그날 주변에서 서성이며, 오늘과 그날 사이를 딛고 있습니다.
22년 12월 6일부터, 너무나도 긴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여기 모인 모두의 고된 하루를 어루만져 주십시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신의 시간을 감당하고 있는 가족들의 심령을 부둥켜 안아 주십시오.
원하지 않는 상황이 서린 이 시간이 괴로워, 희미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지 않도록 하시고,
어둑한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여기 모인 모두가 시간이 주는 이런 위협에 삼켜지거나 유혹받지 않도록 우리의 정신을 지키시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인생의 갈 길과 행할 바를 알려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뵙게 하옵소서.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 안긴 사랑하는 도현이와도 마주할 수 있도록 여기 있는 모두의 눈을 열어주소서.
고전13:12-13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순간을 사는 우리는 많은 시간들 속을 지나왔습니다.
희노애락애오욕이 연속으로 점철된 순간들은, 앞에 있던 삶의 자욱들을 지워주지요.
그런데, 그 소멸의 섭리 속, 특별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억의 주인과 긴밀히 잇대어진 존재들, 직접적으로 접촉된 이들 간의 서사이지요.
그런 이들과 함께 꾸려낸 추억은요. 사람의 심연 속 참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휩쓸리지도 않으며, 바람에 날리지도 않습니다.
무게도 없는데, 그런 이들과 함께 했던 추억은 더할 나위 없이 묵직하고 무겁습니다.
도현이와의 기억이 아마 그럴 겁니다. 아니,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타인이 가늠하는 것보다,
각자에게 있어 더, 더 깊고 무거울 겁니다.
그래서 도현이는 참 생생합니다.
생생한데, 눈앞에 있지 않아, 더 보고 싶고 더할 나위 없이 얼굴 대 얼굴로 마주하고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비비고, 깜박여봐도 도현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도 이 설교를 작성하며, 도현이를 제 눈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담긴 도현이를 이집사님과 정집사님, 그리고 시현이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담기지 않더라구요.
제 방식으로는 볼 수 없어, ‘하나님, 어찌하면 도현이를 마주할 수 있습니까?’라고 여쭸는데,
제 머릿속에 번쩍 드는 생각은, ‘네 눈으로는 볼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도현이는 우리 시신경으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도현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 속에 있는 이가 아니니, 당연한 것이지요.
‘하나님. 그러면 어떻게 볼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침묵하시더라구요. 침묵하시길래 저도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이 이어지던 나날 속, 답이 주어지더라구요. 그 답은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13장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본문은 도현이 입관예배 때, 제가 설교했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 멀리서 찾고 있었더라구요.
그때 생각했지요. ‘아. 내가 이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구나.’라고 말입니다.
도현이를 볼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세계, 인간적 관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맞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눈으로 도현이를 바라보려 한다면 헛수고도 그런 헛수고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현이를 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가, 이 현실을 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없을 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눈으로 보려 갈망하는 연약한 시도와, 이승을 떠나선 사고할 줄 모르는 한계를 넘어서면 그것이 보입니다.
그 방법이 오늘 본문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도현이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세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요, 그 방법이 기록된 13절을 우리 합독해보겠습니다.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 첫 단계는. 믿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신이 운행하시는 피조세계에 속해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 신의 다스리심은 늘 선을 빚어낸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어둑한 날을 걷으시고, 새 날을 여시는 아버지의 일하심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자녀에게 좋은 것 주시려고 하시는 아버지의 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할 때 피어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신을 향한 믿음이 틔워내는 소망을 지니시는 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입니다.
소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식적 관점을 넘어서게 하고, 현상세계 너머에 있는 이상 세계를 바라고 인식하게 합니다.
이 소망은 허상이 아니에요. 허황된 것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이 소망을 온전히 기술해 낼 능력과 언어가 없을 뿐,
신을 향한 믿음이 싹틔워낸 소망은, 현실을 넘어서게 하고, 그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믿음으로, 새로운 세상과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소망을 가진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란 말입니다.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잖아요. 도현이는 지금 사랑에 속해 있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는 삶을 사는 그때, 도현이는 그곳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면 할수록 도현이는 선명하고 진하게 우리에게 보일 거고, 사랑하는 우리가 도현이를 인식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역사를 마주하게 될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밝히 마주하는 그 순간 말입니다.
도현이가 그것 바라고 있지 않겠습니까?
도현이를 눈으로 볼 수 없게 만든 그 아픈 사건이 촉발시킨 어려움들과, 얽히고설킨 감정선들이 혼재한 나날 속,
사랑 안에서 사랑이 된 도현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도현이도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을 보고 싶다 할 겁니다. 만나자 할 겁니다. 사랑 안에서 말입니다.
쉽지 않으시겠지만, 현상 세계 속에서 하늘의 선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틔워내는 소망을 가지십시오. 그 소망을 가지고 현상 세계를 넘어섰을 때,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 칠 때, 그 사랑 속에 있는 도현이를 인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혹자는 삶을 두고 ‘보일 수 있게 만들어진 사랑’이라 말 하기도 했잖습니까?
눈이 아닌, 사랑하는 삶을 통해 도현이를 찾아보시고 인식하시고 바라보십시오. 도현이도 그것 바랄 겁니다.
거기에서 마주하고 싶어 할 겁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언젠가 도현이와 선명히 마주하게 될겁니다.
그 감격의 역사가, 믿고 소망함을 통해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는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의 생의 순간 속, 선명하게 경험되어지길 간절히 빕니다.














닫기